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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말이 없다, 그러나 감정을 남긴다. 영화가 사랑한 세 개의 도시

by 신리뷰 2025. 5. 30.

감정을 도시가 품은 영화들

도시는 말이 없다, 그러나 감정을 남긴다. 영화가 사랑한 세 개의 도시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도시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을 견디는 또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인물의 대사보다 더 많은 걸 말하는 거리, 혼자 걷는 순간에만 들리는 소리, 카페 유리창 너머로 흐르는 시간. 도시라는 공간은 그 안에 놓인 사람들의 감정을 묵묵히 받아내며, 때로는 서사를 이끄는 숨은 주인공이 된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영화 세 편〈비포 선라이즈〉,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미드나잇 인 파리〉을 통해, 공간이 감정이 되는 순간을 들여다본다. 영상미가 너무 예뻐서, 엄청 감성적인 연출장면들이 많아서 기분좋게 봤던 기억이 난다.

〈비포 선라이즈〉, 빈이라는 도시가 감정을 잠시 허락할 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단 하루를 함께 보낸 두 사람의 이야기다. 제시와 셀린은 기차에서 만나, 도시를 걸으며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에서 빈은 단순한 유럽 관광지가 아니다. 낯선 도시가 주는 일시적인 자유와 익명성이 두 사람의 감정을 허락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유럽 풍경이 생각보다 아름다워서 넋 놓고 봤다.

 거리의 낡은 건물, 무작위로 들어간 레코드 가게, 도나우강을 따라 걷는 산책. 그 안에는 감정이 말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공간이 말을 끌어내는 구조가 있다. 빈이라는 도시는 사랑을 약속하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다만 그날 하루, 감정이 흘러가기에 충분한 여백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 아프고, 더 오래 남는다.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도쿄의 침묵이 감정을 끌어올릴 때

 소피아 코폴라의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은 미국 배우 밥과 젊은 여성 샬롯이 도쿄에서 우연히 만나 보내는 짧은 시간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도쿄는 소음이 가득한 도시이지만, 주인공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침묵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 외국이라는 이질감 속에서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의 존재에 집중하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설정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주인공들이 주는 풋풋함과 설렘이 영상미와 함께 전달되는 것 같아서 흐뭇하게 봤다.

 호텔 창밖의 네온, 정적인 엘리베이터, 한밤중 바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이 모든 도시적 요소는 관계의 긴장을 풀지 않고 오히려 감정을 증폭시킨다. 도쿄는 이들에게 위로도 주지 않지만, 대신 어떤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은 그 도시의 침묵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감정을 건네기 시작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 시간이 흐르지 않는 도시의 마법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과거에 대한 환상, 현재의 회피, 그리고 창작자들의 감정적 고립을 파리라는 도시를 통해 풀어낸다. 주인공 길은 약혼자와 여행 중 매일 자정이 되면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이 설정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영화는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시간의 층위를 이용해 감정을 해석한다. 타임루프물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다. 이런 타임루프 영화에서 정말 뜬금없는 개연성의 스토리라인만 아니면 나는 굉장히 흥미롭게 보는 편인데, 미드나잇 인 파리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생각보다 영상미는 없었지만 주인공들이 주는 미묘한 긴장감이 굉장히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였다.

 동시대에 없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길은 결국,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마주하게 된다. 파리는 그 두려움을 비판하지 않고 감싸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오래된 벽돌, 노란 조명, 촉촉한 돌길은 감정의 마모를 흡수하는 감각적 장치가 된다. 그 결과, 길은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 파리라는 도시는, 그 과거의 잔상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이끌어낸다.

 이 세 영화 속 도시는 침묵하지만, 그 침묵이 감정을 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빈은 일시적인 자유, 도쿄는 소외의 공명, 파리는 시간의 중첩. 도시라는 공간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배경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도시를 지나쳐가지 않는다. 그 안에 머물고, 길을 걷고, 때로는 감정을 숨긴다. 우리는 그 침묵의 도시 속에서, 가장 진실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